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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슈지(中村修二 ) 교수 인터뷰

1993년, 전세계 기업과 연구자그룹이 열띤 개발 경쟁을 벌이던 청색 발광다이오드(LED)를, 도쿠시마 지역의 일개 회사원이던 나카무라 슈지 씨가 오로지 혼자 힘으로 개발했을 때, 전세계가 크게 들썩였다. 이 개발로 인해 나카무라 씨는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회사원으로서의 미래도 보장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해 왔고, 나카무라 씨는 좋아하는 연구에 자유롭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고향에 대한 애착심을 가슴 한 켠에 묻어 두고 미국 행을 결심하게 된다. 도쿠시마의 일개 회사원이 46세의 나이에 캘리포니아대학 교수로 가게 된 것이다.

얼마나 높은 영어의 장벽이 나카무라 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2014년 10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다시 한 번 전세계 학술연구계로부터 그 위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그의 연구인생의 절반을, 영어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더듬어 보았다.

취재/구성=후루야 유코(古屋裕子, 크림슨인터랙티브)

35세가 될 때까지 무서워서 비행기도 못 탔다

― 에히메현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카무라 씨는 도쿠시마대학 대학원에 진학한 후, 도쿠시마 지역 회사인 니치아화학공업에 취직하게 된다. 시코쿠 지방 외의 세상은 모른 채 약 10년 동안 회사 연구원으로서 반도체 연구개발에 매진하던 나날이었다. 그런 그가 35세이던 어느 날 미국유학의 기회가 찾아왔다.

저는 35세에 미국유학을 떠날 때까지 영어와는 아무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암기를 강요당하는 과목들은 무조건 싫어했기 때문에 영어도 당연히 싫어했죠. 수학이나 물리학 원서를 영어로 보는 것은 즐거웠지만 끝까지 읽어 본 적도 없고, 시골에서 자란 탓에 영어회화와도 아예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학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당시 근무하던 니치아화학공업에는 '청색 발광다이오드 장치에 관해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실 절반은 거짓말이었습니다(웃음). 과학 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한 번쯤은 해외에 나가봐야 하지 않나 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외에 나가는 건 처음이었기에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일단은 비행기가 떨어지지 않길 기도했지요(웃음). 35세가 될 때까지 비행기 추락이 무서워서 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도쿄 출장 갈 때도 무조건 기차를 이용할 정도였죠. 영어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식의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회사 지원을 받아서 도쿠시마에 있는 유명한 영어회화학원에 다녔지만 소용 없더군요. 미국에 도착해서는, 경유지인 애틀랜타공항 안내방송도 전혀 알아 듣질 못했어요. 탑승시간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으니까 이상하다 싶어 게이트에 가보니 '게이트 이미 닫혔습니다!' 그러더군요(웃음). 그 만큼 영어를 전혀 몰랐습니다.

바보 취급한 녀석들에게 갚아주겠다

플로리다대학에서 1년 간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참 힘든 유학시절이었지요. 저는 석사학위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연구원들이 바보취급 하더군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세계였으니까요. 과학의 세계에서 박사학위가 없는 사람은 과학자가 아니라 한낱 엔지니어(기술자)입니다. 다시 말해, 학사졸업자나 석사졸업자들은 '보조'일뿐이고 연봉도 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박사과정 대학원생과 교수들은 끼리끼리 모이고, 저 같은 보조들은 토론에 끼워주지도 않아서 언제나 혼자 묵묵히 연구만 할 뿐이었습니다.

유학을 통해 얻은 거라면 분한 마음이라고나 할까요. 반드시 박사학위를 따겠다, 박사학위를 따서 플로리다 학생들에게 갚아주자, 나를 바보 취급한 녀석들에게 되돌려주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되돌려준다기 보다는,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과학자가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연구의 원동력이 되었죠. 당시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서는 영어논문을 네댓 편은 써야 했기 때문에, 일본에 돌아가면 영어논문을 써서 꼭 박사학위를 취득하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3편 연속으로 탈락한 영어논문

귀국 후, 그런 분한 마음을 원동력 삼아 맹렬히 영어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직장이던 니치아화학공업에서는 사원들의 논문집필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숨어서 썼습니다. 제가 처음 자력으로 쓴 영어논문은 청색 발광다이오드 개발을 가능하게 한 투 플로 MOCVD장치에 관한 논문이었습니다.

실험을 하면 복수의 데이터가 도출됩니다. 이들 데이터는 언뜻 봐서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습니다. 제 각각인 데이터를 어떻게 연결해서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 것인가, 논문의 성패는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말이죠, 어떤 데이터가 나오든지 커브 선을 그리듯이 스토리를 잘 만들어 냅니다. 사실, 그게 제 특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논문을 쓸 때 그렇게까지는 고생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는 대놓고 논문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평일 5일 동안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데이터를 통해 스토리를 구상한 후에 토요일, 일요일에 몰아서 썼습니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빠르면 대여섯 시간 만에 다 써버립니다. 머리 속에서 따끈따끈할 때 스토리를 한 번에 토해내야 하기 때문에, 문법이며 단어며 크게 상관하지 않았죠. 이런 계통의 논문에서는 영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쓴 3편의 영어논문은 투고하자마자 전부 과감하게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영어가 엉망이어서'라는 겁니다(웃음).

46세, 영어로 진행한 첫 강의는 기절 직전

― 나카무라 씨는 세계 최초로 청색 발광다이오드 개발에 성공한 이듬해, 40세의 나이로 염원하던 박사학위를 취득, 회사에서도 높은 직책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자신이 현장에 가지 않고 부하에게 감독, 지시를 하는 것만으로도 연구가 진행되어가는 상황을 보면서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혼자서 마음껏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이제 이 회사에는 없구나'. 그 시기에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교수직 제의가 들어왔다. 미지의 대륙에서, 대학 강의라는 전혀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까, 나카무라 씨는 고민 끝에 미국 행을 결심하게 된다.

캘리포니아에 가기 전날 밤, 가장 걱정되는 게 강의를 영어로 해야 한다는 점이더군요. 긴장해서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20년 동안 회사원으로 살면서 학생을 상대로 강의해 본 적도 없었을 뿐더러, 박사과정을 경험한 적도 없는 논문박사이지 않습니까. 일본에서 강의를 하더라도 긴장할 텐데 하물며 미국에서, 그것도 박사과정을 상대로, 게다가 영어로 말입니다. 첫 강의를 생각하면, 엉망진창이었죠, 아마(웃음).

영어를 잘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대학 안에 있는 영어회화수업에 가볼까 생각도 했죠. 시간이 없었다는 건 변명밖에 되지 않겠지만, 영어보다는 연구가 중요했고, 강의 준비나 연구를 병행하면서 수업에 나가는 게 무리였습니다. 게다가, 교수로 부임했을 때 이미 46세, 그 나이에 어학을 시작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영어에 대해서는 이미 뜻을 접었습니다. 물론, 영어 네이티브로 태어나지 않은 게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말을 잘 못하는 편이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사회와 융화되지 못하는 '히키코모리'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곳 생활에 익숙해질 때까지 가족 모두 노이로제 증상을 겪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미국 사람들끼리 토론을 하고 있으면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하면 솔직히 무섭거든요.

일본인이 영어사회에서 히키코모리가 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한 연구실에서 미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그룹 사이에 대립이 있었던 예도 있습니다. 미국인 학생들은 수집한 데이터를 가지고 토론을 하려고 하는데, 일본인 학생들은이 영어에 자신이 없었던 탓에 뒤로 내뺐던 겁니다. 미국인들은 그런 태도를 보고 '저 녀석들이 데이터를 숨기고 보여주려 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로 인해 서로의 마음이 전달되지 않으면서 충돌이 발생한 겁니다. 그야말로 영어의 장벽인 셈이죠.

저도 경험이 있으니까 히키코모리가 될 수 밖에 없는 마음도 이해하고 영어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압박은 정신분열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부족한 영어실력으로는 세계를 무대로 과학을 펼칠 수 없다고 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본 이공계 학생들이 일본어를 버릴 정도의 각오로 영어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과학도 앞으로 점점 세계 수준에서 뒤쳐지고 말 것입니다.

학생들이 좋아하는 강의를 하고 싶다

캘리포니아대학에 온지 벌써 7년이 되었네요. 영어에 대해서도 스스로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했고, 실제로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어보다는 지금 제게 중요한 과제는 '강의의 질을 높이는 것'입니다.

미국에는 학생들이 강의에 대해 역채점하는 시스템이 있어서, 그것으로 교수에 대한 평가가 내려집니다. 학생들이 모두 시험에서 100점 만점을 받으면 만족도가 올라가고 강의에 대한 평가도 좋아지겠지만, 만점을 받게 하려면 강의를 쉽게 해서 질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한 편, 모두가 낙제점을 받을 정도의 어려운 강의라면, 교수에 대한 평가도 좋지 않을 테니까 최악의 케이스지요. 그러니까 강의의 질을 떨어뜨려는 안되고, 그렇다고 어렵게 강의를 해서도 안 되는 겁니다.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강의를 해야 하는 것이죠. 직접 만든 교재를 나눠준다든지 이런저런 궁리는 하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강의하면 학생들이 좋아할지, 알찬 강의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가 중요하겠죠.

평가항목이 100개 이상이나 되는데, 그 중에는 '영어 수준'에 대한 항목도 있습니다. 평가 결과요? 웬만하면 안 보려고 합니다(웃음)! 영어에 대한 평가는 포기했습니다. 부임 초기에는 영어를 어떻게 잘 말할까가 중요했지만, 지금의 고민은 그 다음 차원으로 넘어갔습니다. 영어를 잘 하고 못 하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될 대로 되라, 그것보다는 결실 있는 강의를 하고 싶다, 이제야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네요.

(2007년 8월 31일, 캘리포니아대학 샌타바버라캠퍼스 나카무라 교수 연구실에서)

나카무라 슈지(中村 修二)

공학박사

1954년 아이치현 출생. 도쿠시마대학 공학부 전자공학과 졸업 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 1979년 도쿠시마현 안난시 소재의 니치아화학공업 입사, 개발과에서 반도체 연구개발을 시작. 1993년 12월, 20세기에는 불가능하다던 고휘도 청색 LED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 성공. 1999년 니치아화학공업을 퇴사하여, 2000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샌타바버라캠퍼스 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 청색 발광다이오드 발명에 관한 대가 지불을 요구하며 니치아화학공업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던 재판에서는, 2005년 도쿄고등법원 항소심 판결을 통해 회사 측과 약 6억 800만 엔에 합의. 2006년에는 노벨상에 가장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밀레니엄상'을 수상. 2014년 10월, 염원하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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